셰프 코리 리가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한 주방은 주방 동선과 시스템까지 완전한 현대 서양식이었다. 그 어떤 레스토랑보다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관리하는 주방에서 만드는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그의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최고의 주방이 이곳에 있었다.

10명의 정예부대로 이뤄진 주방
베누에서 식사를 한 다음 날 나의 견습은 시작됐다. 레스토랑은 저녁 서비스만 제공하지만 주방 팀은 오전과 오후 두 개 조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오전 팀은 8시에 출근하여 육수와 소스, 장시간 조리해야 하는 육류를 준비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배달되는 모든 식재료를 꼼꼼하게 살피며 정리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체크하고, 작은 오점이라도 있으면 가차 없이 반품했다.
오전 11시쯤 셰프 코리 리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베누의 주방에 머무르는 내내 저녁 서비스 팀 중 레스토랑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12시쯤 되자 오후 팀 조리사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보통 서비스를 끝내고 그날 회의까지 마치면 새벽 한두 시가 되는데, 베누의 모든 조리사들은 하루 13~14시간을 정말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레스토랑에서 일한다면 모두 부주방장 정도의 위치에 오를 정도로 화려한 경력과 탄탄한 실력을 두루 갖춘 멤버들이었다.
전통 한국식품으로 가득한 주방
코리 리가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한 주방의 모습은 주방 동선과 시스템까지 완벽한 현대 서양식이었다. 내가 가보았던 그 어떤 레스토랑보다 깔끔하고 효율적으로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관리하는 주방에서 만드는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그의 완벽주의가 주방 곳곳에 배 있었다.
냉장고와 창고를 보니 또 한 번 미소가 지어졌다. 다양한 한국의 장류, 김치 등 익숙한 식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김치는 레스토랑에서 직접 담그며 간장도 조선간장, 진간장, 저염 간장을 두고 각각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고 있었다. 고추장과 춘장은 다양한 고기요리에 이용하며 종류에 따라 맛에 포인트를 주는 용도였다.
베누의 음식 준비과정을 보면 코리 리의 음식에 관한 철저한 원칙을 느낄 수 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해산물과 캘리포니아의 유기농 식재료는 베누 음식의 시작이고, 여기에 동서양의 다양한 조리 기술이 더해진다. 숙련된 기술과 긴 조리과정이 필요한 식재료는 셰프들이 직접 준비했고, 주방 보조들이 주로 다루는 채소 등은 잎사귀 하나를 다듬고 보관하는 것도 철저하게 원칙을 따랐다.
많은 다이닝 레스토랑들에서 구입해서 쓰는 식재료도 베누에선 직접 만들어 쓰는 경우가 많았다. 딤섬의 만두피, 잣으로 만든 두부, 사케에 쪄낸 포와그라 테린, 메추리알 피딴, 타피오카 전분으로 만든 칩까지 전부 2~3일 이상의 준비가 필요한 요리였다. 이렇게 베누의 주방은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을 기하기 위해 기꺼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가 오너 셰프로서 굳건히 지켜가는 신념은 ‘주방이 조금 더 부지런하면 그 기쁨이 손님에게 전해진다’는 간단한 진리였다.

돋보여야 할 재료만 확실하게 살리는 원칙
베누의 음식은 기본 베이스를 프렌치로 유지하되 재료의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메뉴의 이름을 보면 전복 그레노블로이제(Abalone Grenobloise)*, 체리 에스파뇰(Cherry Espagnole sauce)* 소스와 같이 이름은 프렌치지만 그 재료는 한·중·일 등 아시아와 남미를 넘나들었다. 그 중엔 분명 한국의 요리지만 맛과 모양, 조리과정까지 전부 새롭게 뒤 바뀐 요리들도 있었다.
베누의 모든 메뉴는 접시 안에 재료 구성이 최대 4~5개 이상을 넘지 않도록 했다. 많은 맛을 복합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아닌 그 접시에 돋보여야 할 재료를 확실하게 살리고 의도에 맞는 선명한 맛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간단한 구성이지만 재료간의 궁합, 맛의 밸런스, 식감이 모두 고려된 완성도 높은 요리였다. 코스 중간에 서빙하는 위트 있는 요리들은 긴 코스에 지치기 쉬운 혀를 달래주었다. 라임과 크렘프레쉬를 곁들인 갯장어 스프링 롤, 체리 꽃과 피스타치오를 곁들인 오이 그라니떼 같은 요리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음식 하나를 만들어도 코리 리만의 룰이 있었고, 이 모든 것이 철저한 기본기가 바탕이 된 그의 실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진화하는 레스토랑의 근본은 ‘완벽주의’
셰프 코리 리는 작은 체구에서 퍼지는 강한 카리스마로 주방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직원의 작은 실수, 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에 만족하지 못하면 큰 불호령이 떨어졌고 주방은 한 순간에 얼음장으로 변했다. 코리 리의 지휘 아래 이뤄지는 직원간의 놀라운 호흡으로 베누는 주말이면 100명에 가까운 손님들을 무리 없이 맞이했다.
베누는 유럽과 미국을 통틀어 필자가 경험한 최고의 주방 환경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이야 말로 10명의 주방 정예부대가 이루어내는 최고의 장소라 생각되었다. 이곳 주방에서 벌어지는 코리 리의 완벽주의와 장인정신은 베누를 계속 변화하게 만들고 있었다. 견습 마지막 날이 되자 성취감과 함께 부러움과 아쉬움이 너무 컸다.
서비스 도중 VIP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있던 날이었다. 직접 창고로 달려가 한국산 천일염을 절구에 갈아낸 뒤 애피타이저 위에 뿌리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재미 교포에게 느껴지는 묘한 동질감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레스토랑 베누와 셰프 코리 리, 그의 재능과 열정, 자신의 인생을 담는 요리가 미국을 넘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그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 그레노블로이제(Grenobloise) - 프랑스 남동부 그레노블(Grenoble)에서 유래한 조리법으로 주재료에 브라운 버터, 케이퍼, 파슬리와 레몬즙을 곁들여 조리하는 방식이다.
- 에스파뇰 소스(Espagnole Sauce) - 전통 프랑스 요리의 5가지 기본 리딩소스(leading) 중 하나로 주로 고기요리에 곁들이는 진한 브라운 소스를 일컫는다.

강민구
경기대학교 외식조리학과를 졸업하고 미식조리문화연구회 한스푼(韓spoon)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강민구 셰프는 마틴 베라사테기(Martin berasategui)를 비롯해 스페인의 여러 레스토랑에서 견습을 했으며, 현재 노부 바하마(NOBU atlantis) 레스토랑에서 총주방장(executive chef de cuisine)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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