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란 ‘어떤 방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가는 자’란 사전적 정의를 갖고 있다. 요리계에도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해 낸 선구자 셰프들이 있다. 프랑스의 폴 보퀴즈, 분자요리의 선구자 페란 아드리아, 채집 요리 열풍을 일으킨 르네 레제피, 퓨전 일식의 선구자 노부유키 마츠히사 등이 이 선구자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들 모두 각자 분야를 개척하고 국제 미식계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 모던요리의 레전드 셰프, 조리복을 벗다
2012년 8월, 미국 모던요리의 선구자 셰프 찰리 트로터가 25년간 운영했던 레스토랑의 문을 닫는다. 그는 지난 25년간 미국에 파인다이닝 음식 문화를 소개한 주인공이자, 수많은 후배 셰프들을 양성하며 미국에 다양한 레스토랑 문화를 소개한 1세대 셰프다. 커다란 스테이크와 마요네즈에 버무린 샐러드를 외식으로 즐기던 미국인들에게 유럽식 정찬 코스요리, 채소만으로 구성된 채식주의 코스 등을 선보이며 큰 호응을 얻었다.
찰리 트로터는 지난 1월 VIP와 함께하는 신년 파티 행사에서 갑작스런 은퇴 소식을 알려 그를 사랑하는 많은 고객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빠르게 변화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업계에서 25년간 한결 같이 최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그의 은퇴는 더욱 갑작스러웠다. 폐점이유는 재정적인 것이 아니라 공부와 여행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은 셰프 트로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자신이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멋지게 박수를 받으며 물러나는 것이 그에겐 더욱 행복한 선택일지 모른다. 25년간 늘 한 자리에서 미국의 올바른 식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 모던요리의 선구자로 찰리 트로터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2007년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30위에 랭크 되었고, 현재까지 미슐랭 가이드에서 부여한 두개의 별을 유지하고 있다. 총 14권의 책을 발표하고 조리 업계의 아카데미상인 제임스 비어드재단으로 부터 총 10여 차례 수상한 베테랑 셰프이기도 하다.
많은 젊은 셰프들이 그의 레스토랑에서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현재 미국 최고의 셰프로 평가받는 그랜드 악츠(Grant Achatz)와 레스토랑 애배뉴의 컬티스 더피(Curtis Duffy), 셰프 그라함 엘리엇(Graham Elliot)까지 현재 미국 모던요리를 국제 탑 수준으로 끌어 올린 젊은 스타 셰프들이 그 주인공이다.

‘명품은 시대와 유행을 타지 않는다’
필자가 미국에 처음 나왔을 당시 서점의 요리 코너에서 접한 찰리 트로터의 요리책은 감동 그 자체였다. 1년 뒤 시카고 방문 때엔 레스토랑이 만석인 지라 그의 음식을 맛보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는데, 결국 이렇게 그의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다고 하니 안타까움이 더 할 뿐이다. 10년이 훌쩍 넘은 그의 요리책은 지금 다시 들춰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명품은 시대와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말처럼 찰리트로터의 요리가 바로 그런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정식 조리사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 정치학을 전공하던 위스콘신 대학교 시절 자신의 룸메이트와 취미로 요리 하던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자신의 적성을 발견한 그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셰프가 되는 길을 걷는다. 트로터는 유럽과 미국의 내로라 하는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미식 여행을 떠나 자신이 진정 감동 받은 레스토랑에서 무급으로 견습을 시작했다. 견습 당시 단지 주방과 요리뿐이 아니라 서비스, 인테리어, 와인까지 관심을 가지며 자연스레 레스토랑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길렀다.
그가 25년 전 레스토랑 찰리 트로터를 오픈 할 당시 최고의 음식에 걸맞은 인테리어와 서비스까지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런 철저한 준비 덕분이다. 유럽식 정찬 문화에서 화려한 격식이 제거된 미국식 고급 정찬요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손님과 조리사간의 친밀도를 높이고 친절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주방에 테이블을 들여놓아 조리하는 셰프들이 훤히 보이는 공간에서 식사하는 셰프’s 테이블은 그가 처음 시도한 서비스이다.
그는 미국 모던요리의 1세대 셰프로서 다양한 사회활동에도 참여했다. 시카고에 다양한 지역 식재료 사용을 권장하는 로컬푸드 운동을 이끌고 유기농과 자연식, 생식의 가치를 소개하며 그와 관련된 책도 다수 발간했다. 동물 인권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푸아그라는 2002년에 일찍이 레스토랑 메뉴에서 제외시켰다.
PBS 공영 방송에서 방영된 자신의 요리프로그램에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미국인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다양한 노력은 지역의 식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어 현재 시카고는 뉴욕, 샌프란시스코와 더불어 미국 3대 미식도시란 타이틀을 얻었다.

1세대 셰프의 노력이 다음 세대를 만든다
무엇보다 그가 애착을 갖는 사회 활동이 있으니 조리사들이 참여 할 수 있는 재능 기부 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국립 중·고등학교 학생과 어려운 생활환경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2~3회씩 자신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한 뒤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직접 체험하고, 그의 레스토랑에서 정식으로 식사하는 것까지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식문화의 가치를 찾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체험 학습이다. 건강한 먹거리, 빈부의 격차 없이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국제 조리사협회가 선정한 2005년 올해의 인도주의자로 뽑히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셰프 찰리 트로터는 해외의 유명셰프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시카고 지역을 넘어서 미국 식문화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바꾸며, 미국의 젊은 셰프들의 해외 진출을 돕기도 했다.
이처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1세대 셰프의 노력은 다음 세대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 많은 미국의 셰프 지망생들이 찰리 트로터를 롤 모델로 또 다른 조리 분야의 선구자가 되기 위해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세대 간의 소통, 그 세대와 다음 세대 간의 되물림이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나라에도 새로운 한국의 식문화를 소개하려 노력하는 많은 1세대 셰프들이 있다. 뉴 코리안, 모던 한식, 코리안 프렌치를 표방한 젊은 셰프들의 도전은 우리 음식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다. 혹자는 이런 도전들을 뼈대 없는 유행으로 폄하하곤 하지만, 섣부른 비교와 판단보다는 그들의 도전을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것이 어떨까.
수십 년 뒤 코리안이란 이름으로 찰리 트로터와 같은 선구자 셰프가 탄생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바다.

강민구
경기대학교 외식조리학과를 졸업하고 미식조리문화연구회 한스푼(韓spoon)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강민구 셰프는 마틴 베라사테기(Martin berasategui)를 비롯해 스페인의 여러 레스토랑에서 견습을 했으며, 노부 바하마(NOBU atlantis) 레스토랑에서 총주방장(executive chef de cuisine)으로 근무했다.
twitter.com/mingle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