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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중식. 피에프창 최형진 아시아 총괄셰프  <통권 391호>
관리자 기자, foodbank@foodbank.co.kr, 2017-09-29 오전 09:28:22



120년 한국의 중식 역사는 40~50여 년간 불 앞에서 웍을 잡아온 화교들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삶에서도 일터에서도 여유가 없었던 이들의 주방은 전장(戰場)과 마찬가지였다. 치열한 화교들의 주방 현장에서 한국인 중식조리사가 살아남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최형진은 살아 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털어놓은 적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글 황해원 기자 banana725@foodbank.co.kr  사진 이종호 팀장 

프롤로그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빌딩이 폭파됐다. 외국인에 대한 단속이 까다로워지면서 불법 체류자라는 명목으로 전 재산을 압류당했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국가가 공식 인증한 아카데미에 등록도 해보고 단기간 관광비자를 얻으려고 괌도 수십 번 다녔다. 8개월 남짓 버티다 강제추방 당하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24살. 1억 원의 빚을 떠안았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이판에서 스낵 바를 운영하며 꽤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온 가족이 그를 믿고 사이판으로 넘어온 지 몇 달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쫓겨나듯 한국에 온 후 몇 개월간 우울증에 시달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억 원의 빚도 실감이 안 나는 데다 승승장구하던 사이판에서의 삶이 일장춘몽처럼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로 인해 가족 전체가 힘들어졌다.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TV만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았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EBS에서 중식 관련 요리 프로그램을 봤다. 현재 ‘루이’의 여경옥, 유신평 셰프를 비롯한 유명한 사부들이 나와 주부들을 상대로 간단한 중식요리를 보여주는 포맷이었다. 커다란 중식도 하나로 모든 식재료를 처리하고, 무엇보다 불을 다루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며칠 후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공지가 떴다. 중식 요리사를 구한다는 것이다. 

20대의 희로애락
지금처럼 큰 주방에서 수십 명의 직원을 진두지휘하는 셰프의 꿈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어릴 적부터 그는 요리를 좋아했다. 맞벌이 생활에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공부하는 형의 저녁을 항상 챙겼고 냉장고 재료로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자연히 요리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바로 롯데호텔로 들어가 뷔페에서 주방 일을 배웠다. 단순 업무의 반복이지만 식재료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21살에는 각종 조리사자격증을 따고 대학에선 식품영양학을 공부했다. 거창한 꿈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지만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다 보니 셰프의 길을 걷고 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순간순간의 선택이 운명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최형진 셰프는 선천적으로 순수한 기질을 갖고 있다.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고 무엇이든 배우려는 의지와 마인드가 있다. 군대에선 쓰리스타의 모든 식사를 담당할 만큼 요리로, 또 인간적으로 신임을 받았다. 제대 후 뭘 하든 잘할 수 있겠다는 용기와 자신감으로 그는 바로 미국 사이판행 티켓을 끊었다. 
버블티와 과일 주스, 샌드위치, 김밥을 팔았는데 장사가 잘됐다. 특히 버블티는 대박이었다. 지금에야 한국에도 공차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버블티가 대중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버블티는 생소한 음료였다. 사이판의 한 지역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정도로 유명세도 탔다. 사람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더니 그렇게 반짝하고는 빚만 잔뜩 안고 한국으로 쫓기듯 나올 줄은 몰랐다. 17년 전의 일이다. 



非일상의 일상화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중식 요리사를 구한다는 공지가 떴을 때 그는 주저 않고 호텔로 전화를 했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다. 다행히 20살, 21살 때 따놓은 갖가지 조리사 자격증과 호텔 실습 경험이 플러스 요인이 됐다. 
이미 한국에 돌아와 수 개월 허송세월한 데다 1억 원의 빚을 갚아나가려면 닥치는 대로 벌어야 했다. 살기 위해 일했고 일하려면 살아있어야 했다. 홀리데이인 호텔을 시작으로 6년간 그는 모든 일상을 반납하고 일만 했다. 주방에 있다가도 브레이크타임이 되면 다른 식당에서 시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호텔 근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아르바이트로 보냈다. 하루 2시간씩 잤다. 사랑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그리고 삶도 없었다. 일상적이지 않은 생활을 일상처럼 살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 당시 그의 인생이 얼마나 팍팍했는지는 그가 5년간 1억 원의 빚을 다 갚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밥은 스탭밀로 때우고 월급이나 추가수당, 아르바이트비는 버는 족족 빚 갚는 데 썼으니까….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어 본 적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의 기억이 송두리째 없어진 것 같다. 동물처럼 일만 했던 것 같다(웃음).”
정신 없이 일만 하는 그를 주변 동료들은 걱정하면서도 신기해했다. 당시 화교인 정세군 주방장 밑에서 요리를 배웠다. 하루 24시간 숨도 안 쉬고 일하는 그의 모습을 정세군 주방장은 마음에 들어했다. ‘근성 하나는 대단한 놈이 하나 있는데…’ 라는 단서를 달고 주변 화교 중식 셰프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중식 파트는 크게 면판, 칼판, 불판으로 나누어져 있다. 판마다 ‘장’이 있어서 말단들은 대장의 말을 반드시 따라야 했다. 전표 담당이 주문을 받아 주방에 전달하면 각 판의 대장들이 말단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표 담당이 “짬뽕 하나!”를 외치면 면판에선 면을 뽑고 칼판에선 채소와 돼지고기를 빠른 손놀림으로 써는 것이다. 완성된 면과 재료를 불판 앞으로 보내면 그때부터 불판 담당이 웍에 볶아낸다. 처음 주방에 들어가면 면판, 칼판, 불판 순서로 일을 배우는데 그 시간이 무지하게 길다. 화교들끼리 ‘웍 잡는 데만 20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마냥 농담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다. 면판 막내에서 장으로, 칼판 막내에서 칼판 장에 이어 마지막 불판 장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주, 2주 동안 해야 할 일을 하루 이틀 만에 해버릴 정도로 시간을 빠듯하게 보내다 보니 남들보다 일을 좀 더 빨리 배웠다. 승진할 기회도 일찍 찾아왔다.”
홀리데이인 호텔 주방 막내로 들어간 지 5년 째 되던 해 ‘홍보석’ 주방장 제안을 받았다. 기적이었다. 현대호텔에 있었던 홍보석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급 중식 레스토랑이었고 내로라하는 중식 대가들이라면 한 번씩은 거쳤던 곳이었다. 당시 최형진 셰프의 나이는 스물아홉. 홍보석의 최연소 주방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이다. 당시 오크우드호텔이 현대호텔을 인수하면서 자연히 홍보석도 오크우드호텔 소속이 됐다. 홍보석 주방장에서 2년 뒤엔 오크우드호텔 총괄셰프로 승진했다. 



중식을 시스템화한다고?
화교들의 전쟁터인 국내 중식시장에서 한국인 셰프가, 그것도 이제 막 20대 딱지를 뗀 젊은 남자가 대한민국 최고의 중식당 주방장이 된다는 건 당시로선 희귀한 일이었다. 
“젊은 녀석이 어떻게 저 자리에 저렇게 빨리 올라갈 수 있느냐며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나와 함께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던 선후배, 동료들은 응원해줬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봐왔던 이들이니까. 홀리데이인 호텔에서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과는 아직까지 그 연이 깊다.”
피에프창을 알게 된 건 4년 뒤다. 미국 1호점을 시작으로 각국에 하나씩 매장을 열며 미국식 중식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중식을 매뉴얼화, 시스템화해 전 세계 매장에서 균일한 맛의 중화요리를 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셰프 개개인의 기술과 경험에 따라 요리의 급이 달라지는 한국의 중식시장과 너무나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웍을 돌릴 때도 수십 년간 내공을 쌓아야 감이라는 게 생기는데 그걸 매뉴얼화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당시 국내 중식업계는 그랬다. 오죽하면 40년 중식의 대가 ‘진진’ 왕육성 선생도 중화요리를 ‘찰나의 음식’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찰나의 집중력과 기술력이 제때 맞아야만 최고의 맛을 낼 수 있는 어려운 분야라고. 
“한 사람의 기술에 의존하는 기존 한국의 중식 시스템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을 웍과 불 앞에서 살아온 많은 사부들의 노고를 존경하고 존중하면서도 일정 부분은 체계화·매뉴얼화해야 다음 세대로 중식을 이어갈 수 있다고 느꼈다.”

기교와 매뉴얼의 접점
당장 미국으로 떠났다. 달라스 애리조나주에 있는 1호점 주방으로 들어가 일을 배웠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십여 년 간 익혀왔던 한국식 중화요리에 대한 감이 겨우 몸에 뱄을 때인데 그동안 쌓은 기술과 노하우를 버리고 다시 밑바닥 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피에프창에 와서 가장 놀랐던 건 직원교육 매뉴얼 북만 20권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백과사전 두께만 했다. 음식 레시피는 물론 국자 하나를 잡을 때의 자세부터 움직임 또 주방 기술과 동선 하나까지 체크하고 연습해야 했다. 한국으로 치면 오랜 경력의 사부가 옆에 수제자를 세워두고 손맛과 오랜 현장 경험에 의한 감을 매뉴얼로 만들어 알려준다는 건데 감동일 수밖에.”
그렇다고 미국식 중식에 시스템만 있고 기교가 없느냐. 아니었다. 중식과 아시안푸드를 넘나들며 중국요리를 하나의 고품격 다이닝으로 업그레이드했다는 것과 그 최적의 맛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말 그대로 기교와 매뉴얼의 완벽한 접점이었다. 
“얼른 한국에 돌아가 이러한 시스템을 많은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중식은 더 이상 외롭고 고단한 여정이 아니라고, 얼마든지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풀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얼른 말해주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식
피에프창을 통해 그가 배운 건 셰프에 대한 이해다. 메인 주방장의 경험치와 실력이 곧 식당의 경쟁력이 되고 그것이 고객 만족도로 이어지는 한국의 시스템과 미국의 중식 체계는 다르다. 헤드셰프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요리로 매력 발산하는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죽이고 모든 요리 파트와 섹션이 항상 일정하게 돌아가도록 유지시키는 관리자의 역할이다. 어떠한 기교나 기술이든 수치화, 계량화한 매뉴얼로 만들어야 하나의 산업이 되고 그것이 후대에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최형진 셰프가 중식시장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다. 1993년 미국 애리조나주 1호점을 시작으로 전 세계 약 300여 개의 매장을 오픈하며 글로벌 중식 브랜드로 성장한 피에프창 아시아 총괄셰프 자리를 맡으면서, 그는 ‘미국식 중식’ 문화를 한국에 뿌리 내렸다. 지난 4년간 그가 한국에 오픈한 피에프창 매장만 8개. 캐주얼아시아요리를 내세운 제2브랜드 ‘페이웨이’ 오픈 매장도 8군데나 된다. 스타필드 하남을 시작으로 부산과 대구, 마산, 인천 송도 등 전국을 다니며 팀을 모아 메뉴를 짜고 전체 시스템을 관리 감독했다. 어느 덧 그의 밑에도 400여 명의 직원이 생겼다. 피에프창에서의 4년은 그렇게 길었고, 또 짧았다. 
가끔은 사부들처럼 요리할 때 독창성과 기교를 부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시그니처 요리’를 갖는다는 건 평생을 주방에 바쳐온 인내에 대한 선물이다. 누군가 그에게, 피에프창에 있었던 4년간 얼마만큼 온전한 자신만의 기교와 기술을 연마했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쉬운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겐 화교 사부 밑에서 갈고 닦았던 현장 경험과 피에프창에서 얻은 정교한 시스템 두 가지 경쟁력을 모두 갖고 있다. 그래서 그의 중식 인생은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중국의 후미진 골목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작은 가게를 차려 술맛 도는 안주와 술을 팔아보고 싶다. 20대에 너무 치열하게, 헉헉거리며 살았으니 이제는 주변 사람들 좀 챙기면서 살아야 않겠나.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도 원없이 만나고, 그렇게 살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다.”

음식은, 특히 중식은 뜨거운 불 속에서 치댈수록 맛과 향이 좋아진다. 사람도 그런 것인가? 최형진 셰프의 뜻이 선한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

 
2017-09-29 오전 09:28:22 (c) Foodba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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