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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3막 1장 - 경기대학교 관광대학 외식조리전공 진양호 교수  <통권 395호>
관리자 기자, foodbank@foodbank.co.kr, 2018-02-08 오전 11:04:45


경기대학교 관광대학 외식조리전공 진양호 교수가 오는 4월 정년 퇴임식을 끝으로 학교를 떠난다. 대한민국에서는 조리사 출신 1호 교수로서 수많은 외식조리인의 롤 모델이 되어 온 그는 조리사의 위상을 끌어올린 장본인이자 수많은 조리사를 주방에서 학교로 끌어낸 외식인의 스승이다.
글 박선정 기자 sjpark@foodbank.co.kr  사진 이종호 팀장

명예로운 퇴임을 앞두고 있다. 28년간 앞만 보고 달려오신 것 같은데.  

퇴임 후에도 전만큼은 아니지만 학교나 기업체 강의는 계속할 계획이다. 감사하게도 여전히 적지 않은 곳에서 나를 찾아준다. 지금은 한창 연구실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중이다. 원래는 자료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다 놓으려 했는데 생각지 못한 좋은 일이 생겨서 이천으로 옮기고 있다. 현재 이천에 조리박물관 건립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조리박물관으로 조리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물건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박물관 측에서 명예의 전당을 만드는데 이곳에 나를 위한 작은 공간을 하나 내어주겠다는 제안이 왔다. 지금 그곳으로 반 정도 이전한 상태다.

얼마 전 퇴임 기념 고별 강연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지난 12월 학교에서 진행했다. 원래 퇴임하는 모든 사람들이 고별 강연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하게도 학교에서 자리를 마련해줬다. 준비해주신 분들과 찾아주신 많은 분들에게 나의 철학과 내가 걸어온 길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면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내 1호 조리사 출신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다른 분들도 있는데 조리사 출신 박사 1호라 그런지 주위에서 조리사 출신 교수 1호로 인정해준다.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강의를 했으니 조리사 출신으로 제일 오랫동안 강의를 한 것은 사실이다.

조리사라는 직업을 택하게 된 이유가 있나.
원래는 태권도 사범으로 운동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군대에서 무릎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태권도를 하지 못하게 됐다. 제대 후 다른 일을 찾던 도중 1978년 롯데호텔 조리부에서 무경험자를 50명이나 채용한다는 공고를 접했다. 요리를 하면 마음껏 먹으면서 편하게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는데 덜컥 합격을 했다. 현재 메이필드호텔 장도현 총지배인 겸 사장도 그 중 하나다. 이들과는 40년이 지난 아직까지 돈독하다.

조리사로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공부하는 조리사들을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 아니었나.
내가 호텔 조리부에 근무했던 70~80년대는 지금과 달리 요리사들이 후배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절대 가르쳐주지 않던 시절이다. 당시 양식 주방에서는 소시지를 직접 만들었는데, 선배와 함께 할 땐 잘 되다가도 이상하게 그가 쉬는 날 나 혼자 하면 죽어도 안 되는 거였다. 소시지 반죽이 끈기 있게 엉기지 않고 순두부처럼 풀어지거나 고기와 기름이 분리돼 못 쓰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배와 하던 대로 똑같이 수십 번을 해도 되질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알고 보니 진짜 중요한 비법을 사용할 타이밍에는 날 심부름 보내고 아무도 없을 때 비로소 ‘신의 한 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비법이란 것이 정말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다. 소시지에 대한 이 특별한 추억(?)은 훗날 나의 저서인 《현대서양요리》에 소시지 레시피를 넣는 계기가 됐다.

힐튼호텔 근무 시절 해외 호텔 인수를 위해 사장단과 출장도 많이 다녔다고 들었다.
1983년 롯데에서 힐튼으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직급은 퍼스트쿡에서 과장으로, 월급은 19만 원에서 46만 원으로 배 이상 뛰었다. 공부하는 조리사가 없던 시절 페이퍼 워크와 경영이 가능한 나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힐튼 주방장이 서양인이었는데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사 후 2주 만에 3750개 레시피를 모두 매뉴얼화는 등 실력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해외 호텔 인수를 위해 헝가리, 케냐, 러시아, 중국 등 많은 국가에 출장을 다녔다. 호텔 인수 시 식음업장 운영과 관리에 필요한 비용과 인력운영 등을 계산할 수 있는 유일한 주방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호텔이 기억에 남는다. 180명만으로도 충분히 돌아갈 주방에 직원이 490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다. 인건비만 줄여도 금방 손익분기를 뛰어넘어 대박이 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인수에 실패했다. 호텔 지분의 상당수를 국가가 가지고 있던 탓에 협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귀국했다.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학사과정으로 행정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제대 후 바로 호텔에 들어갔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학사 학위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대학을 나와 판검사가 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인 방통대의 행정학과에 들어갔다. 방통대에 4년제 과정이 생긴 첫 해에 입학해 정확히 4년 만에 졸업했다. 입학생 1만2000명 중 4년 후 첫 졸업생은 2780명. 그 안에 들기 위해 진짜 독하게 공부했다. 남들처럼 5년 안에, 10년 안에 졸업하겠다는 막연한 목표가 아닌 당연히 4년 후에 졸업하겠다는 목표로 공부하니 결국은 되더라. 정말 독하게 했던 지라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보다는 열심히 하지 못할 것 같다.
1985년 방통대 졸업 후 경희대 관광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1986년 혜전대에서 첫 강의를 했다. 이후 경기대학교, 서울보건전문대, 한양여자전문대 등에서 조리학과 관광학을 가르치다가 1999년 경기대 외식조리학과(당시 조리학과) 전임교수로 와 19년을 근무했다.

조리학 수업에서 교수님만의 ‘킥’이 있다면.
조리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마케팅과 원가관리, 인사관리를 반드시 가르친다. 많은 이들이 요리를 만들 줄만 알지 이것을 어떻게 상품화해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경영주가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말이다. 똑같은 요리를 만들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식재료 원가율이 달라지고, 관리능력에 따라 인건비율이 달라진다. 내가 호텔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경영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케팅과 원가관리, 인사관리가 가능한 외식인력을 키우는 데 가장 중점을 두고 수업을 하는 편이다.   

 


교수로서의 삶을 돌아본다면.
학생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들처럼 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선생이란 남을 가르치는 직업이다 보니 언제나 공부를 해야 한다. 학생들로 인해 스스로를 늘 채찍질하면서 나 자신도 함께 발전해왔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86년 처음 강당에 선 이래 지난 32년간 정말 행복했다. 생각해보면 군대에서 무릎을 다쳤던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절망 끝에 조리사라는 인생의 2막을 맞이했고, 이제는 다시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3막 1장이 시작됐다.

외식업계에도 4차산업혁명 바람이 불고 있다.

3D 프린터와 로봇이 요리를 해도 이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은 줄어들겠지만 메뉴를 기획하고 프로그래밍을 하는 프로페셔널한 인력에 대한 니즈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조리사들은 이제 한 분야를 깊게 파 자신의 전문분야를 만들어야 한다. 소스 하나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특정 분야의 전문의로 소문이 나면 환자들이 줄을 서듯 조리사도 전문 분야를 갖고 해당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살고 쉽게 성공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4차산업혁명에 대비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정부의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 지금의 교육환경에서는 학생들이 4차산업혁명의 환경을 경험해볼 수 있는 시스템이 전무하다. 학교의 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학교와 정부, 산업계가 손을 잡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나 시스템을 만들어 그곳에서 체험수업을 하는 등 새로운 커리큘럼의 개발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교육부와 산자부 부처 간 교류도 없는 현실이라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외식조리 현장에 있는 후배들에게 한 마디.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바른 길을 가라. 요리란 얼렁뚱땅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충해서는 절대 맛을 낼 수 없는 것이 요리다. 혼을 심는, 나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요리를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음식에 장난치지 않는 곳이 베트남이다. 결국은 세계인이 사랑하는 요리가 되지 않았나. 돈이 아닌 사람을 볼 줄 아는 마음가짐, 그런 마음가짐을 담은 요리를 해라. 쉽게 가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다.
얼마 전 SNS에서 접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무인도에 배 한 척이 표류했는데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생존할 수 있는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이들은 씨앗을 심어 열매가 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파다 보니 땅 속에서 금덩어리가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씨 뿌리는 것을 잊고 금을 캐기에 바빴다. 한참 후 무인도에 도착한 구조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했다. 무인도에 남아 있는 것은 생존자가 아닌 수북이 쌓인 금덩어리 그리고 사람의 뼈들이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지를 늘 잊지 말고 살아라.  


은퇴 후 인생계획은.
재능기부를 통해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는 삶을 살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뜻이 있지만 영세한 이들의 창업을 도와주는 일이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다. 인성이나 품성이 바른 사람이 돈을 벌어야 훗날 사회에 공헌도 한다. 내 재능기부가 그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도록 기술뿐 아니라 외식 경영주로서의 자세와 기준을 정립하기 위한 정신교육도 단단히 시킬 셈이다.
교회 봉사 활동도 더욱 적극적으로 할 예정이다(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현재 평촌 한 교회의 장로다). 무료 급식 행사에 몇 번 참가했었는데 음식을 하는 사람이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요리의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무료 급식도 얼마든지 맛있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데 말이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 있다. 가진 것은 많지만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만, 거만, 오만, 자만 네 가지 ‘만’을 버리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이제는 취하지 않고 나누고 버리며 살겠다는 그의 말에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설렘과 가슴 벅찬 뜨거움이 묻어 있었다.

 
2018-02-08 오전 11:04:45 (c) Foodba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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