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성과 발효의 프렌치
임프레션 L’impression
서현민 셰프
임프레션은 숙성과 발효를 프렌치에 접목한 컨템퍼러리 프렌치 퀴진으로 오픈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입소문을 타며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수셰프 자리에까지 올랐던
서현민 셰프는 17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임프레션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다.
글 최민지 기자 min@foodbank.co.kr 사진 이종호 차장
미국 유학 중 진로 결정
서현민 셰프는 고등학교 시절 진로를 호텔경영으로 결정하고 2001년 고등학교 졸업 후 홀로 미국으로 떠나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미국 네바다 주립대(UNLV) 호텔경영학과에서 공부를 하며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요리 수업을 들으며 점차 셰프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 3학년 때 호텔에 인턴으로 실습을 나가며 그 마음이 확고해졌다. 손으로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자신이 만든 요리를 먹는 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에 기뻤다.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행복을 줄 수 있는 그 과정에 매료됐다.
셰프라는 꿈을 찾았으니 이젠 어떤 셰프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게 됐다. 요리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배울 것도 많았기에 그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만난 것이 바로 프렌치다. 당시 미국에는 오래전부터 프렌치 퀴진이 정착돼 있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셰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서 셰프의 모험이 시작됐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레스토랑에서 일을 배웠다. 세계적 수준의 미쉐린가이드 레스토랑에서 조금씩 경험을 쌓던 서 셰프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2013년 미쉐린 3스타인 뉴욕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일레븐 메디슨 파크(Eleven Madison Park)에 합류했고 다니엘 흄(Daniel Humm) 셰프에게 열정과 실력을 인정받아 수셰프로서 역량을 펼칠 수 있게 됐다.
임프레션과 우연한 만남
일레븐 메디슨 파크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을 즈음, 서현민 셰프에게는 새로움이 필요했다.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어요. 계속 미국에서 일을 할까, 아니면 프랑스 파리를 갈까 고민을 하던 중이었죠. 왜 어떤 일이 잘 되려면 착착착 순조롭게 진행된다고 하잖아요. 한국을 떠난 지 17년 만에 다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기까지도 그리 어렵지 않고 자연스러웠어요.”
서 셰프는 한국의 모 기업으로부터 짧은 프로젝트 하나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레스토랑을 일주일 씩 비우는 것은 불가했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만들어졌고 한국에 오게 됐다. 이 기간 동안 지인을 통해 (주)마크세븐 심주현 대표를 만났다. (주)마크세븐은 뱅가(와인바), 마크스(경양식 레스토랑), 현담원 그릴(한우 오마카세), 스시마이(스시)를 운영하는 기업으로 당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오픈을 계획하고 있었고 서 셰프에게 총괄셰프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서 셰프가 이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간단했다. 기업에서 운영하지만 모든 권한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파인다이닝의 방향성부터 식기류나 인테리어까지 모두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세계적인 셰프들과 일하는 동안 자신도 그런 셰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던 그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2017년 초, 17년 만에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그해 11월 파인다이닝 오픈을 목표로 두고 콘셉트부터 생각해나갔다. 하지만 예상만큼 쉽지는 않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임프레션은 당초 예상보다 1년 늦은 2018년 11월 오픈했다. “오히려 저에겐 오픈이 늦춰진 게 다행이었어요. 한국의 시장을 이해하고 한국의 식재료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죠. 한국의 F&B 시장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시간이었어요.” 뉴욕에서 했던 요리와는 상당부분 차이가 있었다. 우선 음식의 간부터 달라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이후 국내여행을 다니며 한국의 많은 음식들을 접했고 강좌를 들으며 공부하면서 점점 한국의 요리를 이해하게 됐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다년간 프렌치 요리를 해왔지만 한국에 오면서는 오로지 한식을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히려 독이 됐다. 한국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 떠나 있었고 그간의 세월을 짧은 시간 내에 습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음으로 깊게 와 닿는 것이 없으니 레스토랑의 방향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한국의 음식을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숙성과 발효가 생각났어요. 된장, 간장, 고추장을 빼놓고는 한식을 말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영역을 넓혀 고민하다보니 하몽이나 맥주도 발효와 관련돼 있더라고요. 발효라는 콘셉트 안에서 내가 하던 것, 내가 잘 하는 것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숙성과 발효 음식에 대해서도 공부하며 깊이 파고들었다.
프렌치 요리와 전통주 페어링… 시너지 창출
한식을 해야 된다는 강박에서 탈피한 서현민 셰프는 ‘컨템퍼러리 프렌치 퀴진’을 콘셉트로 결정했다. 사계절 내내 같은 음식이 아닌 제철 재료를 활용한 시즌 메뉴를 구상했다. 술지게미로 발효해 구워낸 빵과 함께 서비스하는 버터에도 봄철 채소인 냉이와 함께 다시마, 구운 김 등을 접목시켰다. 봄 메뉴로는 보리누룩에 숙성 시킨 계절 생선, 누룩 소금에 숙성한 양고기, 30일 쌀누룩에 숙성한 한우(이하 런치), 찹쌀과 누룩을 이용한 가자미식해, 누룩 숙성 광어, 더덕 그라탕(이하 디너) 등을 준비했다.
“미국에서는 시장에 가서 딱 보이는 제철 재료를 중점으로 요리했어요. 그런데 한국은 비닐하우스도 많고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재료들이 많아 계절감이 뚜렷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계절 메뉴를 구성할 때 재료보다 분위기에 대한 상상을 먼저 했어요. 한국의 특정 계절을 떠올렸을 때 그려지는 풍경을 생각해보고 그걸 어떻게 접목할까 고민했죠. 봄 시즌 아뮤즈부쉬의 푸아그라, 벚꽃젤리와 벚꽃소금이 그렇게 탄생됐어요.”
임프레션에는 페어링 코스가 있어 메인 코스 요리와 와인·전통주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음식에 따라 술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에 시즌마다 변화가 있다. 전통주와 와인을 블렌딩해 웰컴드링크(디너)로 내놓을 만큼 서 셰프는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높다. 페어링에 전통주를 넣겠다고 생각한 것은 임프레션의 방향성을 확고히 할 때부터였다. “한국에서 전통주를 접하고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많은지 몰랐거든요. 재미있기도, 신기하기도 했어요. 함께 일하고 있는 프랑스인 소믈리에 야니스와 양조장 투어를 하며 전통주를 엄청 마셨죠. 데이터를 구축하고 페어링을 할 때 어떤 술을 써야 좋을지 논의도 많이 했어요.” 와인 사이사이에 전통주 페어링 코스를 넣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
“처음 타깃은 외국인이었어요. 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음식을 먹고 싶듯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했죠. 술은 음식과 따라가기 때문에 전통주는 꼭 필요했어요. 일본 도쿄에 가면 일본식 프렌치를 하는 유명한 레스토랑이 있고, 사케와 샴페인을 블렌딩해 판매하는 곳도 있어요. 부럽더라고요. 그리고 나도 그런 걸 해야겠다 싶었죠.”
전통주 페어링이 한국인들에게는 반응이 별로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많은 고객이 호응했다. ‘낮에 누가 술을 먹냐’는 주위의 우려 때문에 당초 런치에는 글라스 와인만을 판매했는데 페어링 요청이 많아 지금은 런치에도 즐길 수 있다. 우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6 Spring Amuse Bouche(Lunch)
(오른쪽부터) 술지게미와 방풍나물로 버무린 담양죽순, 크림에 익힌 조개와 펜넬을 올린 타르트, 그뤼에르치즈와 봄마늘을 넣은 슈, 된장에 하루 동안 절인 푸아그라와 제주금귤젤리·벚꽃젤리와 벚꽃소금·브리오쉬 토스트, 제주청귤과 청고추로 버무린 청어 위에 백다시마를 올리고 테프칩을 곁들임, 오리다리 콩피를 아욱으로 감싼 뒤 퀴노아를 올림.
셰프로서 더 성장하는 과정
오픈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임프레션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음식 하나하나에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비주얼 퀄리티가 높아 SNS용 사진으로도 인기가 높고, 프렌치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평도 듣고 있다. “어떤 분께서 음식을 다 드신 뒤 ‘셰프님, 고민한 흔적이 보여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마음이 느껴지는구나 싶어 깜짝 놀랐죠. 그래서 더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미국에서 함께 일했던 다니엘 흄 셰프님께서 ‘변화를 해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을 해주셨어요. 아직 이 레스토랑이 사계절을 겪지 못했잖아요. 차근차근 하다보면 데이터가 쌓일 것이고 그러면 더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같이 일했던, 존경하는 셰프님들이 한국에 왔을 때 선뜻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요리를 하고 싶어요.”
서현민 셰프의 개인적인 목표는 셰프를 꿈꾸는 이들이 요리를 배울 수 있도록 레스토랑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요리에 관심이 있어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중간에 꿈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아 안타까운 마음에서다.
“전 요리만 했던 사람이고 이제야 요리에 있어 플러스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뉴욕에 있던 제가 갑자기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제 자리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또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