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황금
스페인 ‘하몽’

스페인 사람들의 하몽 사랑은 유별나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햄인 하몽은 단백질과 칼로리가 아주 풍부하고, 마른 빵과 물만 있으면 돼 스페인 군인들의 비상식량이기도 했다. 또한 결혼식이나 생일, 성탄절이 되면 집집마다 하몽을 다리째 하나씩 걸어놓고 온가족이 모여앉아 와인과 함께 즐긴다.


‘태양의 나라, 스페인’. 스페인은 고야의 필라르 성당 프레스코화나 가우디의 파밀리아 성당 뿐 아니라 애절한 기타 선율과 현란하고 역동적인 몸짓의 플라맹고, 집시 킹스의 ‘보라레(Vorare)’ 등 떠올릴 것이 수도 없이 많은 나라다.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이글거리는 사랑 이야기가 넘치는 스페인에는 미식가와 먹을거리가 참 많다. 스페인 사람들은 보통 하루에 다섯 끼를 먹는다. 아침 8시에 먹는 데사주노(Desayuno)는 시리얼과 토스트, 까페꼰레체 빵과 우유로 가볍게 먹는다. 11시쯤 먹는 오전 간식 알무에르소(Almouerzo)는 크루아상과 보까디요(스페인식 바게트 샌드위치)에 오렌지 주스나 코르타도(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넣은 커피)를 곁들인다. 오후 2시에 점심 식사인 코미다(Comida)가 시작된다. 전채요리와 주 요리, 후식 그리고 까페로 이어지는 푸짐한 식사가 끝나면 달콤한 낮잠인 시에스타를 즐긴다. 오후 6시쯤 저녁 간식인 마리엔다(Merienda)로 간단한 유제품과 과일 또는 비스킷, 케이크를 먹는다. 10시가 되면 저녁 식사인 세나(Cena)를 먹는데 타파스를 곁들인 맥주나 와인을 마시는 본격적인 ‘바르 문화’가 시작된다.

바르 문화와 타파스 그리고 하몽
바르에서는 와인과 맥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낮에는 간단한 식사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만남의 장소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퇴근하면서 혹은 저녁 산보를 하면서 가볍게 “소주 한잔 하자”고 하듯이 “타파스 하러 가자”고 한다. 바르에서 타파스를 곁들여 술을 한 잔 하고 또 다른 바로 옮기면서 타파스와 맥주나 와인을 즐기며 바르를 순회한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 중 하나인 바르가 한 집 건너 있다고 할 정도로 많은데 아무리 작은 마을이더라도 반드시 하나 정도는 있다.
타파스는 간단한 식사도 되면서 맥주나 와인의 안주가 된다. 생선, 새우나 오징어 튀김, 샐러드, 바게트 위에 해산물, 고기, 채소를 올린 음식들로 쇼 케이스에 진열해둔다.
타파스의 기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날씨가 좋아서 노천 식사를 즐기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달큰한 향이 나풀거리는 와인 잔에 달려드는 벌레를 막기 위해서 먹던 안주를 잔 위에 덮으면서 타파스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손님 초대 요리에 많은 종류의 음식을 조금씩 차려내는 아랍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이런 타파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하몽이다.

기쁜 날 항상 함께하는 최고급 하몽, 이베리코
하몽은 스페인이 승승장구하며 남·북 아메리카 전역과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넓혀가던 15세기 무렵, 남미의 정글과 풍토병 그리고 혹한을 견디며 전투에 참가하던 수많은 군인들에게 전시 비상식으로도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수 세기 전, 스페인 군인들의 비상식량이었던 하몽은 마른 빵과 물만 있으면 단백질과 칼로리가 아주 풍부한 영양식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는 참나무가 우거진 산악지대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하부고(jabugo)산을 으뜸으로 친다. 그 곳에서 도토리를 먹고 자란 검은 흑돼지 뒷다리로 만든 하몽이 최고급품으로 품종관리는 물론, 사료에서 위생관리에 이르기까지 주 정부차원에서 철저히 관리한다. 또 1년 이상의 흑돼지로 만든 하몽을 ‘하몽 이베리코’ 라고 해서 각별하게 취급한다. 검은 발굽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남겨두는 이베리코 하몽은 스페인에서는 식탁 위의 황금으로 여긴다.
하몽은 향신료와 첨가물이 들어가는 일반적인 햄들과는 달리 마에스트로의 철저한 관리 속에 15~24개월 동안 소금과 바람, 시간이 만들어 낸다. 서늘한 곳에서 2년 동안 숙성시키는 과정까지를 거쳐야 비로소 하몽이 완성되는데 숙성기간이 길수록 돼지기름의 향기가 독특해지고 맛도 좋아진다.
보통 마트에선 다리째 팔기도 하고, ‘하몽’ 자르는 날카롭고 긴 특수 칼로 종이처럼 얇게 썰어서 팔기도 한다. 얇게 썬 하몽은 윤기가 잘잘 흐른다.
스페인에서는 명절에 품질 좋은 하몽을 선물로 주고받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다. 새해를 앞둔 한해의 마지막 날 12월 31일이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연말 행사이다. 이 날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몇 주일 전부터 주부들은 해산물과 고기, 캐비어, 송로버섯 등을 준비하는데 가장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햄인 하몽이다.
결혼식이나 생일 등의 특별한 날에도 빠지지 않고, 성탄절이 되면 집집마다 하몽을 다리째 하나씩 걸어놓고 온가족이 모여앉아 와인과 함께 즐긴다.

영화 ‘하몽하몽’의 강렬했던 하몽과의 첫 만남
이런 하몽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비가스 루나 감독의 영화 ‘하몽하몽’에서였다. 영화를 봤던 그 당시, 나는 하몽을 먹어 본 적이 없고 하몽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영화 하몽하몽에서 라울이 휘두르던 돼지 뒷다리가 바로 하몽이었다. 내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먹은 하몽은 알고 보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먹은 적이 있는 장봉과 프로슈토와 거의 비슷한 햄이었지만 영화 장면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레스토랑이나 선술집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하몽은 장봉이나 프로슈토보다 깊고 묵직한 누린내가 풀풀거렸다. 질깃질깃하게 씹히는 생햄의 식감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스페인 여행이 거듭되자 짭쪼롬하고 구수한 맛이 입안 가득히 퍼질 때 느껴지는 하몽 특유의 맛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래서 올리브 오일을 바른 바게트에 종이처럼 얇게 썰은 하몽을 넉넉하게 올린 ‘하몽 보카디요’를 여행 내내 즐겨 먹었다.
요즈음은 가끔씩 꼼꼬무리한 하몽과 달콤한 맛이 뚝뚝 흘러내리는 메론과의 얼토당토 않는 어울림에 홀딱 빠져 스페인 와인 ‘엘 린체(El Linze)’까지 찾곤 한다.

백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