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없고 소박한 맛이 담긴
라클레트

라클레트는 중세시대의 문헌에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스위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스위스 가정에서는 크리스마스나 가족 행사 때마다 라클레트를 준비한다. 라클레트 치즈를 녹여 찐 감자에 곁들여 먹는 요리로, 본래는 마터호른 북쪽 기슭의 발레 지방에서 예로부터 전해진 전통음식이다.


혀 속의 보석을 캐게 해준 라클레트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모차르트를 듣는 사람과 카왈리를 듣는 사람, 벗은 마야를 좋아하는 사람과 입은 마야를 좋아하는 사람,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
치즈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그 분류가 명확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자에 속하는 나는 우리 음식이 아니어서 익숙하지 않은 맛과 향 때문에 시도를 하지 않는 후자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는 브리야 사바랭의 말을 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래야 혀 속의 보석을 캘 수 있어”라고 하게 된 것은 20여 년 전, 이맘때 즈음이다. 파리에서 살다 온 친구가 해준 스위스 요리인 라클레트에 매혹 당하고부터였다. ‘한 줌, 넉넉히, 수북이’라는 우리 고유의 조리법으로 어머니의 손맛을 제대로 낼 줄 아는 그녀는 살림솜씨뿐 아니라 마음결이 참 곱고 따스한 사람이다. 다가오는 유효기간이 걱정스러웠다는 프랑스에서 가져온 누르스름한 치즈 한 덩어리가 바로 스위스산 라클레트 치즈였다.
라클레트 치즈는 두 달 이상 숙성시킨 치즈로 조직이 단단하고 노란 빛을 띠며 담백하고 고소한 호두맛과 향이 났다. 처음 맛본 치즈지만 아주 매력적이었다. 얇게 썰어 샌드위치에 넣거나 와인에 곁들여도 좋단다. 친구는 파리에서도 프랑스산 라클레트 치즈보다 깊고 풍부한 맛이 있는 스위스산을 더 선호했단다. 라클레트에 흠뻑 빠져 파리 생활을 하다 돌아 올 때, 커다란 스위스산 라클레트 치즈를 한 덩어리 사온 것이다.

감자와 치즈의 환상적인 조화
라클레트에서 치즈 다음으로 중요한 재료인 찐 감자, 싱그러운 샐러드 한 접시로 상을 차렸다. 산악국의 농민요리에 걸맞게 꾸밈없고 소박한 맛이 담긴 라클레트였다. 원래 발레(Valais)라고 불렸으나 19세기 이후 ‘문지르다, 깎아내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라클레(racler)로 바뀐 스위스 전통요리였다.
라클레트는 중세시대의 문헌에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스위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스위스 가정에서는 크리스마스나 가족 행사 때마다 라클레트를 준비한다. 라클레트 치즈를 녹여 찐 감자에 곁들여 먹는 요리로, 본래는 마터호른 북쪽 기슭의 발레 지방에서 예로부터 전해진 전통음식이다. 오두막에서 목동들이 겨울철 난로 불에 녹아내리는 치즈를 나이프로 긁어 먹는 데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라클레트 치즈는 따뜻하게 녹이면 풍미가 더욱 깊고 풍부해지기 때문에 전용 요리 기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손바닥만한 1인용 치즈 팬과 채소나 육류 등을 구울 수 있는 열판 위의 그릴 팬으로 구성된 간단한 기구다.
팬에 살짝 녹으면서 꼼꼬무리한 치즈 향이 나기 시작했다. 치즈 향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듯한 식탁에서 맛도 모르는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그렇게 라클레트를 즐겼다. 짭조름하고 꼼꼬무리한 냄새를 풀풀거리는 치즈가 그냥 무덤덤하기만 했던 감자를, 맛과 향으로 화려하게 치장해줬다. 하얀 분이 포슬포슬하게 핀 감자에 부드럽게 녹아 흘러내리는 치즈를 얹어 먹는 단순한 요리법과 근사한 기능의 라클레트 기구에, 그날 나는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아름다운 라클레트 요리 사랑
라클레트 전용 기구를 프랑스에 주문해서 받던 날, 나는 오랫동안 애타게 그리던 이를 만난 것 같이 설레었고, 그때부터 라클레트와의 아름다운 요리 사랑이 시작됐다. 그때는 구할 수 없던 스위스산 라클레트 치즈를 대신해 아메리칸 치즈나 모짜렐라 치즈, 엠엔탈 치즈를 녹였다.
찐 감자만 준비해도 되고 좀 더 풍성하게 차리고 싶은 날이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살치살 몇 점, 튼실한 새우 몇 마리, 토마토, 양파, 버섯, 파프리카, 단호박 등의 채소를 준비한다. 이외에도 구울 수 있는 식재료면 무엇이든 활용한다. 작은 치즈팬에 치즈를 녹이는 것은 물론이고 달걀 프라이를 해서 감자에 얹어 먹는 것도 재미있다. 그릴 팬에는 고기나 해산물, 채소를 번갈아 굽는다.
라클레트는 아무리 요리 솜씨 없는 사람이라도 멋지게 차려 낼 수 있는 매력적인 요리로 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예전에는 귀한 치즈를 구하기라도 하면 아껴먹다 남긴 치즈를 공기와 닿지 않도록 랩에 꽁꽁 싸서 냉장실에 보관하다가 곰팡이가 나서 버린 적도 더러 있었다. 발효 식품이라 곰팡이 난 부분을 잘라내고 먹어도 된다는 사실을 통 몰랐을 때였다.
스위스에서는 주로 겨울철에 많이 먹는 요리지만 언제나 좋은 치즈를 구할 수 있는 우리는 햇감자가 한창인 요즈음이 라클레트의 제철이 아닌가 싶다.
껍질이 보라색이고 속살이 흰 자서감자, 겉과 속이 모두 짙은 보랏빛을 띠는 자영감자, 겉이 장미 빛이고 속살은 붉은 빛이 도는 노란색인 로즈 감자는 찌거나 구워 먹으면 파슬파슬한 그 맛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로즈 감자는 세계적인 감자 권위자인 감자박사 임학태 교수가 개발한 감자로, 달지 않은 밤 같아서 밤감자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싶을 만큼 그 맛이 아름답다.
그냥 먹어도 좋은 찐 감자에 스위스산 라클레트 치즈를 녹여 얹던 날, 꼼꼬무리한 치즈와 무덤덤한 감자와의 예기치 않은 조화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이 매혹당해 버렸다.


백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