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셰프가 선사하는 조리 철학
셰프 에릭 리퍼트(Eric ripert)2

레스토랑 르 베르나르댕은 훌륭한 레스토랑이 가져야 할 이상적인 주방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식재료의 보관에서부터 조리하고 접시에 담아내는 과정까지 불필요한 동작과 동선을 최대한 줄이고 모든 과정이 신속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주방을 보면서 25년간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든 공간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 관련내용은 지난호와 이어집니다.


초보 주방장에게 최고의 훈련장소
르 베르나르댕은 주말 저녁이면 대략 300여 개의 생선요리가 주문된다. 때문에 생선 스테이션에는 다양한 종류의 생선을 다루는 전문 조리사를 배치하여 많은 양의 주문이 몰아치는 바쁜 서비스 시간도 완벽하게 치러내고 있었다. 워낙 주문량이 많다 보니 조리사에겐 실제 주방으로 투입되는 기간이 약 2~3개월만 되어도 고급 기술 하나를 마스터 할 정도로 좋은 훈련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곳의 주방은 조리사에게 최고의 훈련 장소이자 자신의 기량을 뽐낼 무대가 되는 것이다.
6개의 스테이션으로 나뉜 르 베르나르댕의 주방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소스를 만드는 스테이션이었다. 르 베르나르댕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신선한 해산물에 맞는 최고의 조리법과 그에 어울리는 르 베르나르댕만의 소스를 곁들이는 것이다. 이곳 음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약 20가지의 소스들은 매 서비스마다 모두 새로 만들어지며 이렇게 정성껏 준비된 소스들은 고객들이 모든 음식을 받을 때마다 서버가 접시 위로 소스를 부어 주는 사이드 서비스로 제공되었다.
필자 역시 기회가 되어 소스 스테이션에서 일을 도울 수 있었다. 다른 소스의 베이스로 사용할 1)버터 베르 블랑(beurre blanc)을 만들고 소스에 사용할 2)미르 포와(mire poix)를 준비하면서 그들이 만드는 소스를 전부 맛볼 수 있었다. 탄탄한 프렌치 테크닉을 기반으로 아시아와 남미, 유럽의 재료를 적절하게 사용한 소스들은 무엇보다 주재료와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특히 아귀요리에 곁들이는 사케와 미소를 이용한 소스, 관자에 곁들이게 될 코코넛과 페루산 노란고추(Aji amallio)를 곁들인 소스가 기억에 남는다. 소스에 많이 사용되던 일본과 페루산 재료들은 굉장히 친숙한 것들이라 나중에 응용하기도 좋았다.

존재만으로 의미 있는 공간, 르 베르나르댕
레스토랑 르 베르나르댕은 해산물을 좋아하는 이에겐 꿈같은 공간이다. 굴, 참치, 농어, 킹크랩, 랍스터, 문어, 한치, 대구, 랑구스틴, 도미, 넙치 등 당일 아침 받은 신선한 30여 가지의 해산물이 메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통의 레스토랑처럼 전채요리와 메인요리, 찬요리나 더운 요리 등으로 메뉴를 분류하지 않고 이 다양한 해산물들을 조리법에 따라 세 가지 섹션으로 분류했다. 열을 가하지 않은 생 해산물에 소스와 가니쉬를 더한 simply raw, 최소한의 조리만을 하여 재료 자체의 맛을 살린 barely touched, 각 해산물의 특성에 맞춰 간단하게 조리한 lightly cooked까지 다양한 해산물을 사용하는 레스토랑답게 참신한 메뉴구성이 더욱 돋보였다. 각각의 섹션에는 십여 가지 요리에 사용된 재료와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었으며 각 섹션마다 하나씩 메뉴를 골라 자신만의 코스를 구성하는 식이었다.
재료가 워낙 좋으니 맛본 음식 하나 하나가 전부 훌륭했다. 김치 소스를 곁들인 넙치 카르파치오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굉장히 흥미로웠고 푸아그라와 랑구스틴, 시금치로 구성된 샐러드는 함께 곁들인 화이트 발사믹 소스와의 조화가 매우 훌륭했다. 진한 버섯 향이 풍기는 생선 육수에 익혀낸 홍어요리는 그날 먹었던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식사를 하는 내내 마치 일식을 접하는 것처럼 그 어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보다도 재료 자체에 초점을 맞춘 심플한 맛에 적잖이 놀랐다. 진하고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미국인들에게 르 베르나르댕 같은 레스토랑은 그 존재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셰프 에릭 리퍼트가 소유하는 유일한 레스토랑
해마다 대략 1000여 개의 레스토랑이 오픈하고 문을 닫는 대도시 뉴욕,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는 수많은 레스토랑이 경쟁하고 있는 가운데 25년간 한결같이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르 베르나르댕의 비결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셰프 에릭 리퍼트의 존재일 것이다. 많은 셰프들은 자신의 레스토랑이 명성을 얻음과 동시에 새로운 투자자를 얻어 비즈니스 셰프로 전향하곤 한다. 유명 셰프들이 새롭게 오픈하는 레스토랑에서 자신의 명성과 손님의 기대치에 맞는 음식을 내는 것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런 무리한 사업 확장은 자칫 현재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에 손실이 되기도 한다.
에릭 리퍼트는 리치칼튼 호텔의 레스토랑 세 곳을 컨설팅하기는 하지만 진정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고 운영하는 것은 오직 르 베르나르댕 뿐이다. 많은 레스토랑들이 그들의 비즈니스를 키우고 좀 더 많은 이익을 내는데 초점을 맞추는 데 비해 에릭 리퍼트는 레스토랑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가 얻는 수익의 더 많은 부분을 레스토랑에 재투자한다.
필자가 르 베르나르뎅에서 견습하는 동안 셰프 에릭 리퍼트는 서비스 직전 모든 스테이션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수 셰프와 의견을 교환했다. 매 서비스마다 직접 소스의 맛을 보고 간이 부족하거나 농도가 약간 옅다며 수정을 요구했다.
그가 주방에 서지 않을 것이란 나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그는 작년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간 수많은 호텔과 기업으로부터 또 다른 르 베르나르댕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르 베르나르댕이 내 소유로 내가 일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장소로 남고 싶다. 진정 이곳 르 베르나르댕의 주방에서 하는 일이 행복하며 앞으로 또 다른 25년 후에도 이 곳에서 같은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런 셰프 에릭의 철학은 직원들의 소속감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셰프 드 뀌진 크리스 밀러는 18년째 그와 함께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수 셰프들도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왔다.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은 얼마 전 오픈 이래 처음으로 한 달 간의 리노베이션 기간을 가졌다. 변화무쌍한 대도시 뉴욕에서 25년간 늘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레스토랑 르 베르나르뎅, 앞으로 25년간 그들이 써나갈 또 다른 역사가 너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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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르 블랑(beurre blanc) 하얀 버터를 의미하는 정통 프랑스 소스는 식초, shallot에 버터를 넣어 진하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휘저어 유화시킨 소스
2) 미르 포와(mire poix) 스톡, 수프, 브레이징, 스튜 등의 향미를 내기 위해 당근, 양파, 샐러리 등의 잘게 썬 채소와 월계수 잎, 통후추, 백리향 같은 향신료를 혼합한 것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