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족들과 함께 떠난 제주도 여행의 목표는 ‘맛있는 음식을 무조건 다 먹고 가자’였다. 3박4일 동안 맛집 지도까지 만들어 가며 신나게 먹으러 다녔던 이번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제주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스트 엔드」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이다. 글·사진 이세은

필자 소개 이세은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배우다. 평소 글쓰는 것을 좋아해 다양한 매체에 기고를 해왔으며, 음식과 음식문화에 대한 관심도 많다.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 

평소 레스토랑이나 브랜드의 이름은 단순할수록 경쟁력 있고 호감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처음 가보는 사람에게 제주도 지도를 펴놓고 찍어보라 해도 맞출 수 있을 만큼 「이스트 엔드」라는 상호는 섬 끝자락의 정확한 위치를 나타낸 것으로 단순 명료 그 자체였다.

그곳에 도착하자 서울의 개성 넘치는 레스토랑과 식당들에서도 쉽게 보지 못했던 심플하고 색다른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뭔가 하려고 애쓰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레스토랑은 본래 다른 가게였던 자리를 얻어 새로 보수한 것이라 하는데, 많이 손대지 않은 모습이었고 아마 동네 구멍가게나 슈퍼를 운영했을 법한 형태였다. 자리에 앉으니 ‘칸칸이 라면과 세제 등이 들어차 있고 혹은 밧줄이나 공구들을 파는 곳이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상상이 저절로 되었다. 양옆으로 미는 유리문도 오랜 세월 사용했던 그대로 것이었으리라. 직원은 부부로 보이는 셰프와 서빙 겸 운영을 맡은 여자 지배인 단 둘 뿐. 이런 자그마한 가게 자리에, 그것도 제주도 시골마을에서 프렌치 레스토랑이라니… 

4개뿐인 테이블 위 냅킨을 고정시킨 것은 조개껍데기였고, 메뉴도 제주도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 요리로 재료의 싱싱함 때문인지 그 맛이 기대 이상이었다. 

이곳은 가격도 신선하다. 세트 메뉴 중 두 가지 코스는 2만5000원, 세 가지는 3만 원이다. 서울 청담동의 경우 커피 한 잔이 만 원 이상인 경우도 많고, 또 일반 가정식 프렌치 레스토랑과의 가격을 비교하면 경우에 따라 다른 레스토랑의 단품 메뉴 한 가지보다도 저렴한 가격이다. 메뉴마다 테이블 세팅이 모두 다시 되는 등 서비스의 질도 손색이 없었다. 이곳이 아무리 제주도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프렌치 레스토랑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가격이다. 단 4개의 테이블과 브레이크 타임까지 지켜가며 저렴한 가격에 프렌치 요리를 선보이는 이 사장 부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임대료나 인건비, 재료값이 차이가 나는 것은 감안하고라도 오히려 제주도는 관광지라는 프리미엄과 해안도로에 근접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보단 비싼가격이어도 소비자는 수긍할 것이다. 사실 세트 메뉴 코스 세 가지에 3만 원이라는 가격은 배달전문 피자 체인점보다도 저렴한 수준이다. 다소 프라이빗한 콘셉트이니 고가의 파인 다이닝으로 운영하더라도 운영 수익은 훨씬 좋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그들은 굳이 고집스럽게 다른 곳도 아닌 제주도에 내려와 저렴한 가격의 프렌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것일까?

 

 

소박하고 진지한 요리를 꿈꾸는 곳 

그들에게 연유를 물으니 “얼마 전에 한 손님이 소박하고 진지한 음식에 큰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박하고 진지한 요리가 저희가 추구하고 있던 바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켜 나가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도에 내려와 경쟁보다는 소박하고 진정성 있는 맛을 선보이고자 한 부부의 마음가짐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제주도의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 프렌치 음식을 전파하겠다는 욕심도 보이지 않았고, 여기서 한번 크게 일을 내겠다는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옆집에서 담장을 부수며 보수를 하고 그물을 말리는 동안 그들은 테이블을 세팅하고 그 속에 흡수돼 고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제주도의 동쪽은 개발이 한창이다. 아름다운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을 중국인들이 투자이민으로 많이 사들이면서 국내에선 아까워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한번 방문하면 누구나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답고 소박한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슴 아픈 풍경이다. 제주도 뿐 아니다. 개발과 투자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곳을 해치고 있는지. 아직까지는 자연이 많이 보존되어 있던 제주도 동쪽에서 일어난 심상치 않은 변화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을 때, 이스트 엔드는 쉬어가는 쉼표 같은 느낌을 주었다. 무언가가 개발이 되고 변화가 필요하다면 이런 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 없는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허황된 욕심보다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존재감을 나타내는 방식 말이다.  

 

정성과 진심이 깃든 본질을 원한다 

프렌치 음식은 무조건 비싸고 또 그래야 맛있다는 편견이 엉뚱하게도 제주도에서 깨지고 보니, 우리나라의 외식 문화 특히 청담동 곳곳에 자리 잡은 그에 대한 거품이 조금은 빠질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 또한 사실이다. 예전에는 럭셔리한 파인 다이닝의 비싸더라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통해 색다르고 특별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무분별하고 무의미하게 비싸기만한 레스토랑이 유행처럼 번져 가는 듯하다. 이제 고객들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색다름을 느끼거나 동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음식에서 느끼고자 하는 것은 그 본질인 맛이고, 혹은 그 안에 든 정성과 진심이다. 이제 더 이상은 번지르르한 포장과 거품에 현혹되지 않는다. 포장이 화려하고 꾸밈이 많을수록 오히려 요즘의 사람들은 쉽게 질린다. 스토리가 없는 껍데기로는 고객의 오감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스트 엔드의 주인장들에게 매달 메뉴가 조금씩 바뀌는 이유를 물어보니 “둘이 운영해서 할 수 있는 요리는 한정되어 있고 하고 싶은 요리는 많아서”란다. ‘손님들이 다양한 것을 원하니까’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데 인력이 감당이 안 돼서 할 수 없이 자꾸 바꿔서라도 다 하련다’는 식이다. 또 제철 식재료를 사용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고집과 즐거움이 혀끝을 통해 손님에게 전달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뜻일 게다.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 이름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주도의 동쪽 끝에 있는 소박한 프렌치 레스토랑이 환영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로 돌아가려는 모습이 오히려 미덕과 개성이 되는 시대다.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것이 멋이 되는 시대다. 오너의 철학이 맛으로 고객들의 미각을 자극하는 시대다. 이제 식당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짜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