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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 그릇이 아닌 작품이 되다 - 거창유기 이혁 대표  <통권 429호>
취재부 기자, foodbank@foodbank.co.kr, 2020-11-26 오전 05:46:00

유기, 그릇이 아닌 작품이 되다 

거창유기 이혁 대표


최근 몇 년 새 외식업체에서도 가정에서도 유기 사용이 부쩍 늘었다. 대량생산 유기의 등장으로 접근성이 좋아지면서다. 
대중적이고 저렴한 유기가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높여가는 가운데 작품에 가까운 수공예 유기로 주목받는 젊은 유기장인이 있다. 내후년이면 100년을 맞는 ‘거창유기’의 4대 전수자 이혁 대표다. 
글 박선정 기자 sjpark@foodbank.co.kr  사진 조지철






자동차 시스템 개발자, 유기공방에 발 들이다 
거창유기는 1924년 김석이 장인이 설립한 거창공방으로 시작해 김석이 장인의 문하생이었던 이현오 장인(이혁 대표의 할아버지)을 거쳐 그의 아들인 이기홍 장인, 이기홍 장인의 아들인 이혁 대표까지 4대째 이어오는 유기공방이다. 거창유기가 위치한 거창군 남하면 가조가야로 308번지는 주소상으로 거창유기공단이다. 공단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과거에는 유기를 만드는 곳이 많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거창유기 한 곳만이 남았다. 
이혁 대표가 유기 제작에 발을 들이게 된 건 아버지 이기홍 대표의 건강 때문이었다. 공대 출신인 그는 졸업 후 군 제대를 하고 자동차 회사의 성능개발팀에서 전자 브레이크 시스템을 개발하던 기술자였다. 2015년 갑자기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구급차에 실려 서울 병원까지 이송되는 위중한 상황이 닥쳤고, 이때 회사를 그만두고 거창으로 내려갔다. ‘언젠가는 가업을 이어야겠지’라는 막연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전통을 보여주는 방식에 대한 고민 
그에게 유기공방 일은 갑작스럽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유기 만드는 모습을 보며 자란 데다 아버지를 포함한 기술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던 공간도 부질(쇳물을 녹여 유기를 만드는 작업인 ‘불질’에서 유래)을 하던 작업장이었기 때문이다. 칼싸움 놀이를 할 때도 유기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로 만든 칼을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경영주 입장에서 바라본 유기공방의 앞날은 밝지 않았다. “거창에 내려온 2015년 당시는 기계로 만든 대량생산 유기를 중심으로 유기의 대중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수공예 유기가 설 곳이 없어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이 절실했다.”
이혁 대표의 첫 번째 목표는 ‘전통의 변화’였다. 그동안 막연히 전통을 강조했을 뿐 이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면 이제부터는 롱런, 오래갈 수 있는 함축된 힘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홈페이지를 개편했다.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으로 분위기를 바꾸고 온라인몰을 개설해 판매 채널도 확대했다. 흩어져 있던 재고관리와 판매관리 장부들도 ERP 시스템으로 개선했다. 낮에는 현장에서 유기 만드는 일을 배우고 유기 작업이 끝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프로그램을 정비하는 일을 반복했다. 전통을 현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어느 곳 하나 막힘이 없어야 했다. 제아무리 번듯한 홈페이지가 있다 한들 그곳에서 주문과 배송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중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법이다. 




“에이, 공돌이가 이걸 어떻게 만들어” 
이혁 대표가 유기공방에 와서 처음 들인 기계는 3D 프린터다. 새로운 디자인이 떠오르면 3D 프린터로 출력해 모양을 확인하고 작업장에서 유기로 재현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기계공학과 출신으로 학교와 전직장에서 3D 프린터로 작업을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만들고 버리고, 또 만들고 버리는 일을 2년 정도 반복했다. 두께와 무게를 mm 단위, g 단위로 조절해가며 다양하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이질적인 디자인과 대중적인 사이즈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민하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릇 관련 각종 전시회나 박람회를 찾아다니며 트렌드와 정보를 수집하면서 자연스럽게 출품에도 관심이 생겼다. 2016년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가지고 대한민국 공예품대전에 출품해 특선을 수상했고, 다음 해에도 연이어 특선에 선정됐다. 2017년과 2018년에는 차기세트, 빙수와 죽세트, 1인식기 세트 등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하는 대한민국 우수공예품으로 선정됐다.
이쯤이면 이혁 대표의 미술 관련 이력이 궁금해진다. ‘미술이나 디자인 공부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초등학교 때 다 배우잖아요”라며 특유의 눈웃음으로 회답하는 그. 이혁 대표는 실제 미술이나 디자인 공부를 따로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전시회 출품 시 부스 디자인부터 작품 디스플레이 등 모든 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낼 정도로 미술적인 감각을 뽐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한 번은 전시회 관계자가 우리 부스에 와서 ‘이거 누가 디자인했냐’고 묻길래 ‘제가 했다’고 하자 ‘에이! 공돌이가 이걸 어떻게 만들어!’라며 놀랐던 적도 있다”며 “남들과 다른 것, 나만의 것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의 식기로 서양인을 사로잡다 
2018년에는 프랑스 파리 ‘메종&오브제’에 한국관 전시 작가로 선정돼 우리나라 유기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메종&오브제는 프랑스 파리에서 매년 2차례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홈데코&리빙 인테리어 박람회로 전 세계의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참여해 새로운 트렌드를 선보인다. 
이혁 대표의 출품작은 옻칠을 입힌 화려한 유기와 삼베 문양을 새긴 뒤 검정 옻칠을 한 독특한 유기. 서양인들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기를 보고 ‘보석 같다’며 연신 감탄했다. ‘여기에 있는 것을 전부 다 사 가겠다’라는 사람부터 ‘벽 장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커다랗게 만들어줄 수 있냐’는 사람까지, 유기를 처음 접해본 서양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느낌이 좋았다. ‘나쁘지 않은가보다. 괜찮은가보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메종&오브제 이후 프랑스를 시작으로 미국, 대만, 호주 등 세계 각지에서 거창유기를 찾는 이들이 늘어 지금은 7개 국가로 수출을 하고 있다. 국내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던 중 참가하게 된 메종&오브제를 통해 날개를 단 것이다. 해외시장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가기 위해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서 유기의 안전성에 대한 시험도 마쳤다. 
코로나19 상황이 끝나면 해외에 유기 부티크숍도 오픈할 계획이다. 첫 번째 목표지역은 프랑스다. 이혁 대표는 “한국음식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싶어하는 파트너들과 손을 잡고 다양한 방면으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며 “놋이라는 금속 그리고 유기를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유기의 상식을 깬 ‘옻칠유기’ 
이혁 대표가 2015년 유기공방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유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유기의 디자인이 비슷비슷했다. 이 상황에서 거창유기가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유기 장인이셨다. 작품을 만드는 분이었던 거다. 그렇다면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공예가로서의 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화를 위해 택한 것이 옻칠이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염료를 찾던 중 옻칠에 눈이 갔고, 맨 처음 만든 갈색 옻칠유기로 경상남도 공예품대전에서 수상했다. 여기서 한 단계 진화한 것이 유기 일부에 붉은색과 녹색 등 색을 입혀 유기 특유의 광채와 옻칠의 화려함을 동시에 표현한 작품이다. 다른 어느 그릇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색감과 유기 특유의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질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한동안 넋을 잃게 만든다. 
유기에 질감을 입힌 새로운 시도도 눈길을 끈다. 거푸집을 뜨는 과정에서 삼베로 모양을 내 금속의 차가운 느낌 대신 삼베옷의 가벼운 질감을 살리고, 옻칠로 마무리를 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이들 작품은 현재 한식공방, 옥동식, 윤서울, 한미리, 두레유, 이도멘션, 차림, 쿠마, 요수정 등 요리의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레스토랑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중에는 셰프와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영감을 얻어 탄생한 것들도 있다. 삼베 문양 유기가 바로 그것으로 현재 제조방식 특허를 출원해 놓은 상태다. 

반지, 귀걸이, 굿즈 이어 홈데코 상품 준비중 
이혁 대표는 최근 유기로 만든 ‘송가인 굿즈’를 출시해 화제를 모았다. 가수 송가인의 친필 사인을 새긴 술잔과 수저 세트 등으로 기존 연예인 굿즈와는 차별화된 아이디어와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앞서 가수 신화의 20주년 콘서트를 기념해 반지와 목걸이 등 유기 주얼리를 제작해 5000세트를 완판시킨 적도 있다.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등 유기로 만든 굿즈는 지금도 거창유기 쇼핑몰과 오프라인 전시장을 통해 판매 중이다. 유기로 만든 액세서리는 금과는 다른 은은한 광채와 차분한 색감을 지닌 데다 가격 면에서도 매력이 크다. 최근에는 살균효과가 뛰어나고 깨지지 않는 유기의 장점을 살려 어린이용 유기 식판을 출시했는데, 이것이 젊은 엄마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인기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어린이용 물잔과 숟가락, 포크까지 덩달아 주문량이 증가하고 있다. 
연말에는 유기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유기 다이아 반지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선보일 계획. 그는 “유기를 꼭 식기로만 만들라는 법은 없다”며 “유기 특유의 재질이나 빛깔, 색감은 식기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매력을 발한다”고 말한다. 장기적으로는 유기를 이용해 홈데코 분야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다. 

유기 대여 서비스 ‘다락집’ 
거창유기에서 인기 있는 또 다른 상품은 바로 유기 렌탈 서비스다. 수공예 유기를 사용하고 싶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론칭한 것으로 ‘다락집’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최소 하루에서 최대 3년까지 유기를 대여해 쓸 수 있어 일반 가정에서 기업 행사, 외식업체 등 다양한 곳들에서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대여 시 3년이 지나면 소유권이 완전 이전되는 형태라 맘에 들지 않으면 중간에 대여를 중지할 수도, 계속 사용하고 싶다면 빌려 쓰다가 소유로 전환할 수도 있어 합리적이다. 
사실 다락집 사업은 크게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기를 사용하고 싶어도 목돈이 부담스러워 망설이거나 중저가 또는 황학동 시장의 중고 제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 개념이 크다. 
다락집의 고객 중에는 졸업작품전을 준비하는 대학생들도 있다. 비록 하루 이틀에 지나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거창유기는 그들의 졸업작품을 가장 아름답게 빛내준다. 그는 “고급 유기의 대안이 중저가 유기나 황학동의 중고 유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며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유기를 소개할 수 있다면 유기에 대한 접근성도 한결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유기 명장 선정, 수공예 작품으로 유기의 가치 높이고파 
이혁 대표는 지난달 문화체육부 산하 기관인 (사)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가 인증하는 유기 종목 명장으로 선정됐다. 한국무형문화예술교류협회는 대한민국 문화예술분야에서 무형의 문화적 유산을 전승하고, 창조정신을 더해 독보적 위치에 오른 이들에게 명인과 명장 칭호를 부여하고 다양한 지원활동을 펼치는 기관이다. 그는 “할아버지 시절 도에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돌아가시는 바람에 무산이 됐다. 이후 2007년에 아버지가 무형문화재 심사를 준비하다가 건강 악화로 포기했고, 2017년 다시 한번 도전했지만 어깨 수술이 발목을 잡았다”며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이번 명장 지정으로 아버지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게 된 것 같아 기쁘다”고 전했다. 
거창유기는 이혁 대표의 합류 이후 매년 10억 원이 넘는 매출을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성장 중이다. 대량생산 업체들이 시장 점유율을 높이면서 한때 멈칫하기도 했지만 고급화·다양화를 앞세운 차별화 전략으로 국내외에서 손꼽히는 수공예 유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이혁 대표의 목표는 다양한 공예 기술을 접목한, 보다 새로운 유기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모양은 같은데 단지 수공예라는 이유만으로 비싼 값을 받는다면 소비자는 공감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수공예라는 가치를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하냐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색깔뿐 아니라 다양한 패턴 등을 결합한 작품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내후년은 거창유기가 100주년을 맞는 해이자 이혁 대표가 4대 전수자가 된 지 7년째 되는 해다. 100주년이 되는 해, 이혁 대표는 과연 어떤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2020-11-26 오전 05:46:00 (c) Foodba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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